금릉 남공철 묘역
시향토문화재/금릉 남공철 묘역 이미지
  • 지정번호 : 시향토문화재 제4호
  • 지정일자 : 2002. 12. 16
  • 명 칭 : 금릉 남공철 묘역
  • 소 재 지 :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66
  • 소 유 자 : 의령남씨 충경공파 종회

금릉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은 조선 후기 정치가·문장가이며,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금릉(金陵)이다. 남한기(南漢記)의 손자이며, 대제학 남유용(南有容)의 아들이다. 모친은 김석태(金錫泰)의 딸이다.
1780(정조 4)년 초시에 입격한 후, 1784년 부친이 정조의 사부(師傅)였던 관계로 음보(蔭補)로 세마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산청과 임실의 현감을 지냈다. 179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홍문관부교리, 규장각직각에 임명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우대를 받았다. 또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임되었으며, 김조순(金祖淳), 심상규(沈象奎)와 함께 패관문체를 일신하려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동참했다. 정조 때에는 주로 대사성에 있으면서 후진교육 문제에 전념했다. 순조 즉위 뒤 『정조실록(正祖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했다. 1807(순조 7)년에는 동지정사로서 연경에 다녀왔고, 1817년에 우의정에 임명된 뒤 14년 간 재상을 역임하였고, 1833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평소 김상임(金相任), 성대중(成大中), 이덕무(李德懋)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독서를 좋아했고, 경전의 뜻에 통달했다. 구양수(歐陽修)의 문장을 순정(淳正)한 법도라 하여 가장 존중했고, 많은 금석문·비갈을 남긴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서예사의 '전사자체(全史字體)'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순조, 익종의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수하였고, 저서로는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이 있다. 시문집으로는 『귀은당집(歸恩堂集)』, 『금릉집(金陵集)』, 『영옹속고(穎翁續藁)』, 『영옹재속고(穎翁再續藁)』, 『영은문집(瀛隱文集)』 등이 있다.
묘역은 수정구 금토동에 있는데, 봉분 및 석물은 옛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원형의 봉분은 용미와 활개가 없고, 지위에도 불구하고 문인석과 신도비를 갖추지 않아 검소하다. 특히 비석은 당나라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집자하여 제작한 것으로 금석학에 귀중한 자료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